책에 빠져 살았던 이황
여러 유명한 위인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때로는 이러한 분들의 생애가 궁금해 질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저도 그럴 경우가 많이 있어서 생각이 날 때는 집에 있는 오래된 책을 다시 읽어보거나 여기저기 찾아서 보게 됩니다.
오늘은 퇴계 이황에 대한 일대기를 알아보았습니다.
이황의 아버지는 첫 부인과 2남 1녀, 두번째 부인에서 5형제를 두었다.
그리고 이황은 바로 두번째 부인이 낳은 자식 중에 막내아들이였고 어머님은 여러명의 자식들을 별다르게 차별을 두고 키우지 않고 두루두루 잘 키웠다.
어릴적부터 이황은 논어도 여러번 읽고 잠도 줄이고 먹는것도 생각이 안날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엄청나게 읽어서 건강에까지 무리가 가게 된다.
그 시절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무과, 잡과 그리고 무과로 대략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문과는 말그대로 글을 읽는 선비가 보는 시험이고 무과는 군사나 나라일을 하는 관리를 뽑는것이고 잡과는 나라를 위해 일할 고유한 기술자를 뽑는 시험이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과거 시험을 보라는 권유에도 공부만 하고 싶다고 하였으나 몇년이 흐른뒤에 과거를 보고 난다음에 드디어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바르고 곧은 이황의 심성을 높이사고 신뢰하는 임금은 매우 마음에 들어했었는데 이를 시기하던 김안로는 권모술수를 부려 벼슬을 빼앗고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였다.
그러한 구설수가 오르고 있고 여러가지 일이 있는 가운데 하필이면 이황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는데 돌아가신 어머니 무덤앞에서 2년동안 움막속에서 지내게 된다.
그렇게 2년이 지난뒤에 실의에 빠져서 건강을 돌보지 않다가 몸이 많이 허약해 지게 되고 궁궐로 돌아가게 된다.
돌아온 이황을 보고 임금은 바로 벼슬을 내리고 나라를 위해서 다시 일해달라고 한다.
이황은 어머니 이외에도 두번째 부인이나 아들도 세상을 많이 떠나는등 심신이 지치고 가슴아픈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벼슬을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이황을 보고 여러명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고 몰려들게 될 정도로 이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황을 신임하던 임금은 지속적으로 이황에게 돌아오라고 하였으니 그 가운데서 괴로워하게 된다.
결국 이황을 포기한 임금은 고향으로 돌아가는길에 쌀이나 호두 각종 가죽이나 비단등의 여러가지 선물을 쥐어주게 된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유명한 학자였던 이황은 책을 읽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올바르고 곧은 심성으로 주변 사람이나 어른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다.
심성뿐아니라 여러가지의 과거시험을 보기도 했고 여러차례 합격을 하고 많이 가르치기도 했다.
1501년부터 1570년도까지 살았고 우리가 자주 쓰는 천원짜리 지폐에도 그려진 인물이 바로 이황이다.
일대기를 잠시 살펴보자면 경상도 예안 즉 지금으로 치면 안동에서 1501년에 태어나 1523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공부하고 1528년 진사시에 장원 급제를 하게 된다.
1533년에는 경상도 향시에 장원 급제를 하고 34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에 오르게 되고 1542년에는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어려운 백성들을 두루 살피고 잘못된 지방 관리들을 올바르게 잡기도 하였다.
그 3년뒤에는 을사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548년은 단양군수를 지내기도 했고 1554년은 형조/병조 참의를 지냈고 1566년은 공조판서, 예서판서
1568년은 의정부 우찬성을 거쳐서 대제학을 지내기도 하였다.
1570년은 세상을 떠난 해이다.
이황이 책을 읽을 때는 한번만 읽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수십번을 읽어서 그 속에 담겨진 뜻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전에는 절때로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옆집의 밤나무에서 자기마당으로 떨어진 밤을 보고 주인은 그냥 먹으라고 했으나 이황은 정직하여 본인것은 아니라고 다시 돌려주기도 하는 등의 정직한 성품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