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은 어릴적부터 가난하였고 태어난곳도 가난한 영국의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고 자선단체등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얻고 다녔습니다.


영국의 작은 극장을 떠돌면서 노래를 하고 다녔던 찰리 채플린의 어머니는 목이 갑자기 아픈 병에 걸리게 되고 어머니 대신에 다섯살의 채플린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극장일을 그만두고 옷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 찰리의 형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결국에 집세를 내지 못해서 빈민 구호소로 보내지게 되고 돈이 조금 생기면 아이들을 다시 데릴러 오고 돈이 부족하면 다시 빈민 구호소로 보내는 생활을 반복하며 지냈습니다.


이 때 찰리의 형은 배를 타는 선원이 되서 돈을 벌어오는 일을 하게 되자 찰리 채플린도 가족을 위해서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었고 물건을 날라주기도 하고 책 가게에서 일하고 극장에서는 노래부르고 춤추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큰 기계를 가지고 있는 인쇄소나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런데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계에 눌려 사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윽고 어린이 극단에 들어가게 됬는데 어머니와 멀리 떨어진 곳을 돌아다니다보니 결국 그만두게 되지만 다른 극장에서 빌리 역할을 해달라는 일이 들어와서 그 때부터 찰리 채플린은 연극배우가 되게 되었습니다.


나이 12살에 맡았던 역할로는 셜록 홈즈의 심부름꾼역을 하기도 했는데 이 역할을 매우 잘해서 꽤 유명해 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고 스물살이 넘은 때 미국을 갔다온 다음에 영화배우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다양한 영화감독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은 영화 촬영장 카메라에서 얼쩡거리면서 눈도장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미국의 헐리우드에서는 영화산업이 크게 발전을 하던 시기라서 일찍히 이것을 알아본 찰리 채플린은 이부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12년 찰리는 극단에 있는 사람들과 미국 공연을 떠나게 되었는데 연극 주인공을 맡아서 큰 인기를 얻게 되고 드디어 어느날 한 영화사 사장이 찰리에게 영화출연을 제안하게 되고 연기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감독에게 여러가지 제안을 하게 된 찰리의 능력을 알게 되고 결국 배우뿐 아니고 감독일까지도 하게 됩니다.


찰리 영화는 떠돌이라는 주인공이 나왔는데 그게 우리가 익히 알던 모자를 쓴 단벌신사 낡은 구두, 지팡이가 그 모습이다.



웃기기도 하고 못된 사람을 혼구녕을 내주기도 하고 엔딩에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등의 내용으로 모든 사람들이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웃음과 감동을 준 영화를 많이 만든 찰리는 오랜 시간이 흐른뒤 아카데미 영화제 초청을 받아서 미국을 다시 찾게 되고 결국 아카데미상까지 받게 됩니다.


영국 영화배우이면서 동시에 감독이였던 찰리 채플린은 영화산업이라는것이 막 부흥을 하기 시작할 때 부터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가난과 여러가지 역경을 딛고 일어나서 영화를 제작하고 아카데미상까지 받게 되는등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많이 주었습니다.


188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1919년에 영화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23년에 본인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만든 파리의 여인을 영화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1928년에는 서커스를 제작하게 되고 1936년은 모던 타임스를 제작하고 1940년은 위대한 독재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기도 했었죠.


1972년은 아카데미상 공로상을 받기도 하고 1977년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떠난 찰리 채플린이지만 아직도 가끔씩 영화를 방영을 해주고 일대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가끔씩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 제작시에 어렸을 적에 힘들었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영화를 제작할 때 밝은 미래와 노력하는 사람은 꼭 성공을 한다는것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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