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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1. 04:50

꿩의 특성

꿩은 가끔 시골에 가면 볼 수 있는 새입니다.

 

가끔 어르신들이 장끼, 까투리라고 불리우는 새가 바로 꿩인데 장끼는 수컷, 까투리는 암컷을 의미합니다.

 

주로 풀밭이나 산기슭에 서식을 하고 있어서 한쌍이 보통 함께 먹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 약간 달라지기도 하는데 겨울에는 풀씨등을 섭췰르 하는 편이고 여름에는 작은 벌레나 곤충류 혹은 애벌레등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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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재방송 다시보기

요즘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는 사극 드라마가 태종 이방원입니다. 본방을 대부분 놓치는 편이여서 일부분만 보게 되고 재방송 편성표를 찾아서 시간 나면 다시 시청할 정도로 푹 빠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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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는 수컷의 경우 80cm, 암컷은 60cm정도 되며 분류로는 닭목 꿩과입니다.

 

수컷은 암컷보다 크고 화려한 색상을 가지고 있는데 얼굴에서 눈주위가 매우 붉은 색을 띄며 깃털또한 화려한 적갈색을 띄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암컷은 단색 계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꿩의 천적으로는 여우나 족제비, 수리부엉이, 고양이등이 됩니다.

 

밤에 잠을 잘 때에는 나무위에서 자며 우리나라 텃새중의 하나입니다.

 

짧은 날개로 인해서 일반적인 새처럼 멀리 날지는 못하고 주로 걸어다니는데 풀밭이나 논밭, 산기슭등에서 서식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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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0. 22:59

월트 디즈니의 생애

월트디즈니의 생애


안녕하세요.

저는 디즈니에서 만든 다양한 영화들을 매우 좋아합니다.피가 나오지도 않으면서 재미가 있고 애니메이션이든 실사 영화든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데요.



그런 디즈니를 있게한 월트디즈니의 생애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1901년에 태어난 디즈니는 미국 시카고 태생입니다.그림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던 월트 디즈니는 어렸을 때 부터 긂을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팔기도 했을 정도로 좋아했고 재능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러 동물들을 다양하게 그리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는데요.


고등학교 쯔음에 시카고 예술 학교에서 그림공부를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어느날은 문득 만화영화를 만드는 건 어떨까 고민을 하기도 했었죠.

그러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우체국이나 기차역등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만화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영화 광고를 만드는곳에서 광고에 쓰일 만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렸던 그림을 하나하나 연결해서 보면 영화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장의 요구로 인해서 매우 많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에서 쫓겨나오게 되지만 월트 디즈니는 여기서 실망을 하지 않고 회사 다녔을 때 배웠던 카메라 사용법이나 여러가지 영화에 대한 기법들은 훗날 많은 도움을 주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디즈니는 동료와 함께 만화 영화를 만드는 회사를 세우게 되고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동화등을 활용을 해서 만화영화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금 적인 사정으로 회사 문을 닫아야 했지만 이에 실망하지 않고 월트 디즈니는 헐리우드로 가서 형인 로이와 함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란 회사를 다시 만들게 됩니다.


여기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영화를 만들게 되고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게 됩니다.


그리고 행운의 토끼 오스월드라는 토끼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었지만 계약에 대해서는 미숙했던 그는 토끼 오스월드 캐릭터를 다 빼앗겨 버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크게 낙담을 하고만 디즈니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곰곰히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거기서 바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디즈니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키 마우스의 탄생이 이 때 생겨난 것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어브에게 미키 마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작업을 하게 되는데 아주 멋지고 귀여운 캐릭터가 탄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키마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여러편 만든기 시작했는데 처음 몇몇편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계속 해서 만화영화를 제작하게 됬고 결국에 증기선 윌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증기선 윌리는 큰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이 영화 이후로 컬러 만화영화를 여러편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라는 1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만화영화를 만들었었는데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거을 필두로 본격적으로 많은 만화영화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는데요


그중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터팬이나 신데렐라등이 그것이지요. 아이들은 디즈니의 만화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그 인기는 정말 대단해었습니다.


대략적인 연도 별로 보면 1920년에 미국 캔지스시티 광고 영화사에 들어가서 1923년에 래프 오 그램스 히사를 차리고 1928년에 증기선 윌리의 성공을 시작으로 1932년에는 꽃과 나무라는 영화를 발표하여 아카데미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첫번째 장편 만화영화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는 1937년에 나온 작품이고 1950년에는 신데렐라가 나옸습니다.


그렇게 인기와 더불어 많은 돈을 벌었던 디즈니는 1955년 드디어 세계에서 크고 유명한 놀이공원인 디즈니 랜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뒤 1971년도에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 이전보다 더큰 디즈니월드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월트디즈니의 생애는 1966년에 마감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고 어릴적에 한번이라도 보고 들어보고 읽어봤던 다양한 캐릭터들 도널드덕, 피노키오, 플루토, 덤보등은 모두 월트 디즈니에서 나온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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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9. 06:30

간디이야기 일생 업적

간디의 일생이야기. 그리고 업적


간디는 어릴적부터 제가 많이 들어본 유명한 위인중의 한분입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기도 한데요



인도의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간디입니다.


어렸을 적에 정말 제일 많이 읽었던 책중의 하나가 간디와 파브르였는데요.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가믈가믈한 부분도 있고 해서 찾아봤습니다.


가녀린 몸과 초라한 옷차림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간디가 있었을 당시에 인도는 영국이 다스리고 있었던 때였고 인도 사람을 차별하게 되는 법을 만들어서 영국사람들이 마음대로 했던 시기였습니다.



서쪽 인도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간디는 큰집에서 행복하고 부모님하고 즐겁게 살았는데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게 되었습니다.


인도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믿는 종교인 힌두교를 믿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생물을 죽이면 안되는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했었죠.


겁이 많았던 간디는 귀신이나 뱀등을 특히나 무서워 했었습니다.



간디가 13살이 되던 해에 카스투르바이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친구의 제안으로 영국 사람들은 고기를 많이 먹어서 키도 덩치도 크고 힘도 세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와 강가에서 염소 고기를 먹기도 하고 집에서 몰래 동전을 훔치기도 하였죠.


그러나 힌두교의 율법을 어겼다는 죄책감에 잡힌 간디는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편지를 써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엄청나게 혼이 나고 벌을 받을 줄 알았던 간디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간디의 아버지는 혼내지 않고 반성했으니 되었다고 하고 간디를 안아주게 됩니다.



그렇게 어렸을 적 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은 간디는 19살에 영국의 런던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런던의 한 대학에서 법에 관련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변호사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고 너무 기쁜 나머지 인도에 알리러 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가족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간디에게 방해가 될까바 어머니가 돌아가신것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 뒤 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다가 남아프리카로 떠나게 되는데 거기서도 여전히 변호사 일을 열심히 하다가 기차를 타면서 안좋은 자리에 앉게 되는 차별 대우를 받는 등 여러가지 일을 겪게 됩니다.



그 때에 남아프리카 역시 영국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특히 인도인과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했었습니다.


이런 여러저러한 일을 겪고 생각이 많아진 간디는 결국 입던 양복을 벗고 인도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인도인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고 다짐을 하게 됩니다.



특히 영국인들이 만든 차별을 하는 법에 대해서 따지기를 수없이 해서 결국 법을 없애기도 하였습니다.


인도인들이 당시 남아프리카에도 일을 하러 많이 갔었는데 이러한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인도 본토로 돌아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게 됩니다.


그런 인도인들에게 간디는 평화적인 부분으로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투쟁하자고 하고 아슈람이라는 공동체 농장을 만들게 됩니다.


거기에서 간디의 제자들도 많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눈에 가시같은 간디를 두고 영국 사람들은 싫어했었지만 영국을 도와주면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도와주게 되었지만 결국 약속은 지켜지지 않게 됩니다.



결국 영국 경찰과 군인들은 인도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괴롭히기도 하였습니다.


간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독립운동을 하다가 간디는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의 항의와 거리에서 간디를 풀어달라고 외치게 되고 결국 풀려나오게 됩니다.


투쟁이 거세어지자 결국 영국은 인도를 포기하게 되고 그렇게 염원하던 인도 독립이 이루어 지게 됩니다.


독립이 된 인도는 두개로 나뉘게 되었는데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갈라져서 싸우게 되고 결국 간디는 힌두교를 믿는 청년이 쏜 총에 맞아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인도의 독립을 이끈 지도자인 간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싸워서 원하는 결과를 이뤄내게 됩니다.


년도별로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1869년 인도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나 1882년 결혼을 일찍 하고 1893년 남아프리카로 떠나게 됩니다.


간디는 1894년도에 나탈 인도 국민 회의를 만들고 1915년은 남아프리카에서 인도로 돌아오게 됩니다.


1919년은 영국 제품에 대해 불매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고 비폭력 독립 운동을 하게 되죠.


1944년에 힌두교와 이슬람교 두 종교의 갈등을 해소하고 인도를 하나로 합칠려고 노력을 하였는데 결국 1948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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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은 어릴적부터 가난하였고 태어난곳도 가난한 영국의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고 자선단체등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얻고 다녔습니다.


영국의 작은 극장을 떠돌면서 노래를 하고 다녔던 찰리 채플린의 어머니는 목이 갑자기 아픈 병에 걸리게 되고 어머니 대신에 다섯살의 채플린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극장일을 그만두고 옷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 찰리의 형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결국에 집세를 내지 못해서 빈민 구호소로 보내지게 되고 돈이 조금 생기면 아이들을 다시 데릴러 오고 돈이 부족하면 다시 빈민 구호소로 보내는 생활을 반복하며 지냈습니다.


이 때 찰리의 형은 배를 타는 선원이 되서 돈을 벌어오는 일을 하게 되자 찰리 채플린도 가족을 위해서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었고 물건을 날라주기도 하고 책 가게에서 일하고 극장에서는 노래부르고 춤추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큰 기계를 가지고 있는 인쇄소나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런데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계에 눌려 사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윽고 어린이 극단에 들어가게 됬는데 어머니와 멀리 떨어진 곳을 돌아다니다보니 결국 그만두게 되지만 다른 극장에서 빌리 역할을 해달라는 일이 들어와서 그 때부터 찰리 채플린은 연극배우가 되게 되었습니다.


나이 12살에 맡았던 역할로는 셜록 홈즈의 심부름꾼역을 하기도 했는데 이 역할을 매우 잘해서 꽤 유명해 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고 스물살이 넘은 때 미국을 갔다온 다음에 영화배우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다양한 영화감독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은 영화 촬영장 카메라에서 얼쩡거리면서 눈도장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미국의 헐리우드에서는 영화산업이 크게 발전을 하던 시기라서 일찍히 이것을 알아본 찰리 채플린은 이부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12년 찰리는 극단에 있는 사람들과 미국 공연을 떠나게 되었는데 연극 주인공을 맡아서 큰 인기를 얻게 되고 드디어 어느날 한 영화사 사장이 찰리에게 영화출연을 제안하게 되고 연기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감독에게 여러가지 제안을 하게 된 찰리의 능력을 알게 되고 결국 배우뿐 아니고 감독일까지도 하게 됩니다.


찰리 영화는 떠돌이라는 주인공이 나왔는데 그게 우리가 익히 알던 모자를 쓴 단벌신사 낡은 구두, 지팡이가 그 모습이다.



웃기기도 하고 못된 사람을 혼구녕을 내주기도 하고 엔딩에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등의 내용으로 모든 사람들이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웃음과 감동을 준 영화를 많이 만든 찰리는 오랜 시간이 흐른뒤 아카데미 영화제 초청을 받아서 미국을 다시 찾게 되고 결국 아카데미상까지 받게 됩니다.


영국 영화배우이면서 동시에 감독이였던 찰리 채플린은 영화산업이라는것이 막 부흥을 하기 시작할 때 부터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가난과 여러가지 역경을 딛고 일어나서 영화를 제작하고 아카데미상까지 받게 되는등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많이 주었습니다.


188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1919년에 영화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23년에 본인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만든 파리의 여인을 영화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1928년에는 서커스를 제작하게 되고 1936년은 모던 타임스를 제작하고 1940년은 위대한 독재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기도 했었죠.


1972년은 아카데미상 공로상을 받기도 하고 1977년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떠난 찰리 채플린이지만 아직도 가끔씩 영화를 방영을 해주고 일대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가끔씩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 제작시에 어렸을 적에 힘들었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영화를 제작할 때 밝은 미래와 노력하는 사람은 꼭 성공을 한다는것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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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9. 01:40

퇴계 이황 일대기

책에 빠져 살았던 이황


여러 유명한 위인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때로는 이러한 분들의 생애가 궁금해 질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저도 그럴 경우가 많이 있어서 생각이 날 때는 집에 있는 오래된 책을 다시 읽어보거나 여기저기 찾아서 보게 됩니다.


오늘은 퇴계 이황에 대한 일대기를 알아보았습니다.

이황의 아버지는 첫 부인과 2남 1녀, 두번째 부인에서 5형제를 두었다.



그리고 이황은 바로 두번째 부인이 낳은 자식 중에 막내아들이였고 어머님은 여러명의 자식들을 별다르게 차별을 두고 키우지 않고 두루두루 잘 키웠다.

어릴적부터 이황은 논어도 여러번 읽고 잠도 줄이고 먹는것도 생각이 안날만큼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엄청나게 읽어서 건강에까지 무리가 가게 된다.



그 시절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무과, 잡과 그리고 무과로 대략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문과는 말그대로 글을 읽는 선비가 보는 시험이고 무과는 군사나 나라일을 하는 관리를 뽑는것이고 잡과는 나라를 위해 일할 고유한 기술자를 뽑는 시험이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과거 시험을 보라는 권유에도 공부만 하고 싶다고 하였으나 몇년이 흐른뒤에 과거를 보고 난다음에 드디어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바르고 곧은 이황의 심성을 높이사고 신뢰하는 임금은 매우 마음에 들어했었는데 이를 시기하던 김안로는 권모술수를 부려 벼슬을 빼앗고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였다.



그러한 구설수가 오르고 있고 여러가지 일이 있는 가운데 하필이면 이황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는데 돌아가신 어머니 무덤앞에서 2년동안 움막속에서 지내게 된다.

그렇게 2년이 지난뒤에 실의에 빠져서 건강을 돌보지 않다가 몸이 많이 허약해 지게 되고 궁궐로 돌아가게 된다.



돌아온 이황을 보고 임금은 바로 벼슬을 내리고 나라를 위해서 다시 일해달라고 한다.


이황은 어머니 이외에도 두번째 부인이나 아들도 세상을 많이 떠나는등 심신이 지치고 가슴아픈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벼슬을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이황을 보고 여러명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고 몰려들게 될 정도로 이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황을 신임하던 임금은 지속적으로 이황에게 돌아오라고 하였으니 그 가운데서 괴로워하게 된다.

결국 이황을 포기한 임금은 고향으로 돌아가는길에 쌀이나 호두 각종 가죽이나 비단등의 여러가지 선물을 쥐어주게 된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유명한 학자였던 이황은 책을 읽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올바르고 곧은 심성으로 주변 사람이나 어른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다.



심성뿐아니라 여러가지의 과거시험을 보기도 했고 여러차례 합격을 하고 많이 가르치기도 했다.


1501년부터 1570년도까지 살았고 우리가 자주 쓰는 천원짜리 지폐에도 그려진 인물이 바로 이황이다.


일대기를 잠시 살펴보자면 경상도 예안 즉 지금으로 치면 안동에서 1501년에 태어나 1523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공부하고 1528년 진사시에 장원 급제를 하게 된다.


1533년에는 경상도 향시에 장원 급제를 하고 34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에 오르게 되고 1542년에는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어려운 백성들을 두루 살피고 잘못된 지방 관리들을 올바르게 잡기도 하였다.


그 3년뒤에는 을사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548년은 단양군수를 지내기도 했고 1554년은 형조/병조 참의를 지냈고 1566년은 공조판서, 예서판서

1568년은 의정부 우찬성을 거쳐서 대제학을 지내기도 하였다.


1570년은 세상을 떠난 해이다.


이황이 책을 읽을 때는 한번만 읽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수십번을 읽어서 그 속에 담겨진 뜻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전에는 절때로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옆집의 밤나무에서 자기마당으로 떨어진 밤을 보고 주인은 그냥 먹으라고 했으나 이황은 정직하여 본인것은 아니라고 다시 돌려주기도 하는 등의 정직한 성품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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